대부 2편 (시퀄프리퀄, 마이클몰락, 비토대비)
아카데미 역사상 속편으로 작품상을 받은 영화는 단 두 편뿐입니다. 대부 2편과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저는 대부 2편을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단순한 속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구조가 얼마나 대담한 실험이었는지는 영화를 두 번, 세 번 볼수록 더 선명하게 다가오더군요.
속편이면서 전편인 이 영화의 구조, 어떻게 볼 것인가
대부 2편은 시퀄(sequel)이면서 동시에 프리퀄(prequel)입니다. 시퀄이란 전작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는 속편을, 프리퀄이란 전작 이전의 배경을 다루는 선행 이야기를 뜻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한 편 안에서 교차 편집으로 엮은 방식은 1974년 당시로서는 굉장히 낯선 시도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구조 때문에 오히려 처음 개봉 당시 일부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현재의 마이클 이야기에 관객이 몰입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기이한 형태"라는 비판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견해가 완전히 뒤집혔지만요. 저는 오히려 이 구조가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장치라고 봅니다.
과거의 비토 이야기와 현재의 마이클 이야기는 단순히 시간 순서로 나열된 게 아닙니다. 두 이야기는 끊임없이 대조를 이룹니다. 같은 30대, 같은 아버지, 같은 패밀리의 보스라는 유사한 출발점에서 얼마나 다른 인간이 되었는지를 영화가 화면의 색감과 편집 리듬까지 동원해 드러냅니다. 교차 편집(cross-cutting), 즉 두 장면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는 기법이 1편에서는 세례식과 살인 장면을 겹치는 클라이맥스에서만 썼다면, 2편에서는 그 원리를 영화 전체 구조로 확산한 것입니다.
클레멘자 배우가 출연을 거부해 펜탄젤리라는 새 인물로 대체된 점은 저도 아쉽게 느꼈습니다. 클레멘자와 하이먼 로스의 구도였다면 이탈리아적 가치 대 비즈니스적 가치의 충돌이 더 입체적으로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펜탄젤리라는 인물이 이탈리아 가치의 대변자로 설정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대승적 흐름을 개인 감정으로 망가뜨리는 인물로 더 강하게 읽혔습니다.
비토의 첫 살인 장면이 담고 있는 것들
돈 파노치를 죽이는 장면은 단순한 액션 시퀀스가 아닙니다. 이 장면은 비토 콜레오네가 처음으로 패밀리의 수장으로 등극하는 순간입니다. 그 전까지 그는 친구 두 명과 함께 소소하게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에 불과했습니다.
영화가 이 장면을 시각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이 압도적입니다.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비토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는데, 이는 인간의 시선 방향과 일치하는 순방향(natural direction)입니다. 반면 아래의 파노치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걷습니다. 역방향은 관객에게 무의식적인 긴장감을 심어주는 시각 언어입니다. 살인을 저지른 뒤 비토가 인파 속으로 사라질 때는 방향이 뒤집히면서, 그가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었음을 대사 없이 보여줍니다.
그리고 제가 유독 마음에 걸렸던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비토가 살인을 저지르고 돌아가 처음으로 품에 안은 아이가 바로 아기 마이클입니다. 총의 화약이 묻은 손으로 아이를 받아 안는 그 장면, 비토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전해지는 복선처럼 읽힙니다. 1편에서 비토는 마이클만큼은 범죄의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랐지만, 어쩌면 마이클의 운명은 그 순간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살인 장면 전후로 종교 행렬이 배경에 흐릅니다. 행렬이 이동하는 방향과 비토의 동선이 살인 전에는 일치하다가 살인 후에는 반대가 됩니다. 사회의 흐름에 순응하는 존재에서 그것을 역행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과정을 카메라는 말없이 기록합니다. 저는 대학 시절 고전 영화론 수업에서 이런 화면 구성 분석을 처음 배웠는데, 대부 2편은 그 이론 교과서 같은 영화입니다.
마이클은 왜 죽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가
대부 2편에서 마이클이 저지르는 숙청들을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 형 프레도 콜레오네 — 배신의 동기도, 반격의 능력도 이미 상실한 상태
- 하이먼 로스 — 체포되어 감옥에서 썩을 운명이었던 인물
- 펜탄젤리 — FBI 보호 아래 있어 위협 능력이 사실상 소멸된 상태
- 아내 케이와의 결별 — 물리적 죽음은 아니지만, 관계의 완전한 소멸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굳이 죽일 필요가 없는 인물들입니다. 극 중 가장 냉정한 인물로 묘사되는 톰 헤이건조차 "이 사람들을 지금 와서 다 죽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마이클은 강행합니다.
"친구를 가까이 하고, 적은 더 가까이 하라." 마이클이 자신의 신조처럼 믿는 이 말은 사실 그의 지옥을 설명하는 열쇠입니다. 적을 항상 가까이 두려고 하면, 주변에 친구가 남을 수 없습니다. 적을 제거하고 나면 또 다른 잠재적 적이 보입니다. 그렇게 숙청이 숙청을 낳는 피해망상적 순환 구조에 스스로 갇히는 것입니다. 비토가 "가족을 위한 살인"이라는 믿음 위에 행동했다면, 마이클의 살인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알 파치노의 연기는 이 지점에서 정말 독보적입니다. 빙하 속의 용암이라는 표현이 딱 맞습니다. 표면은 극도로 차갑고 계산적이지만, 그 아래에서 무언가가 끓고 있다는 것이 눈빛 하나로 전달됩니다. 말론 브란도, 로버트 드니로라는 당대 최고 배우들과 나란히 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존재감이었습니다. 대부 시리즈는 나이가 들수록 다르게 읽히는 영화인데, 마이클을 처음 봤을 때와 몇 년 후 다시 봤을 때의 감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처음엔 그가 냉혹해 보였다면, 이제는 그저 외롭고 공허한 인물로 읽힙니다.
엔딩 장면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은 혼자 남은 마이클이 두 가지 플래시백(flashback), 즉 과거 회상 장면을 떠올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첫 번째는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이 있던 날 저녁의 가족 파티 장면입니다. 마이클이 아무도 모르게 해병대 자원입대를 결정했다고 불쑥 밝히는 그 장면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엔딩을 "마이클이 얼마나 순수했는지를 되돌아보는 장면"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이 많습니다. 그런 관점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르게 읽힙니다. 그 파티 자리에서 마이클은 가족과 아무 상의 없이 단독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탈리아 가치를 중심으로 뭉친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족보다 자신의 판단을 우선했습니다. 다시 말해, 마이클은 이미 그때부터 지금의 마이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에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나는 예전에 순수했는데"가 아니라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구나"라는 자각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 플래시백은 어린 마이클이 시칠리아를 떠나는 기차 안에서 아버지 비토가 뒤에서 품에 안아주는 장면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달랐습니다. 비토는 가족을 일구는 방향으로 움직였고, 마이클은 가족을 하나씩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영화는 그 대비를 마지막 두 장면으로 압축합니다.
고전 영화의 매력에 대해 생각할 때, 요즘 영화의 반들반들한 영상과 다른 날 것의 거친 질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미국영화연구소(AFI)의 100대 영화 목록에서 대부 시리즈가 꾸준히 최상위를 차지하는 이유도 그 밀도 때문입니다. 촬영 감독 고든 윌리스(Gordon Willis)가 구사한 깊은 명암 대비, 위에서 쏘는 조명으로 눈 아래 어둠을 만드는 기법은 인물의 내면을 화면에 새기는 방식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