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장으로 다시 본 북파공작원 (인권유린,사회복귀,국가책임)

 

북파공작원 10명 중 1명은 전역 후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극단적 선택을 합니다. 저는 이 수치를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삼촌이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걸 떠올리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환갑이 다 된 지금도 삼촌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변에 사람이 없습니다. 국가가 만들어놓은 상처가 한 사람의 평생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가까이서 본 사람만 압니다.


인권유린 관련 포스터

인권유린: 인간성을 지운 훈련의 실체

HID(육군첩보부대)란 1951년 육군본부 정보국 산하에 창설된 군사 첩보 조직입니다. 적진 후방에 침투해 교란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로, 이른바 북파공작원들이 이 조직을 통해 양성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훈련받은 방식이었습니다.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훈련소에서 수십 개월, 어떤 경우는 30개월 이상을 가족과 단 한 번의 면회도 없이 지내야 했습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진 훈련은 훈련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연탄불로 달군 집게로 살을 지지거나, 쇠파이프와 망치로 구타하는 일이 일상이었습니다. 그것도 '적지에서 고문을 버티는 특수 훈련'이라는 명목 아래. 제가 본 삼촌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훈련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어떤 상태였을지 더 이상 상상이 어렵지 않습니다.

지휘관들이 대원들에게 공공연히 요구한 덕목은 무자비함과 잔인함이었습니다. "극도로 잔인해지고 악랄해지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길"이라는 말이 훈련소 구호로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인간성 말살(人間性 抹殺)이란 말 그대로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판단력을 제거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기계처럼 명령에 반응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훈련의 목표였습니다.

더 충격적인 건 모집 과정입니다. 물색관(物色官), 즉 특수부대원을 비밀리에 선발하는 담당자들은 병무청 게시판에 '특수요원 모집'이라 써놓고 1대1 면담으로 대상자를 설득했습니다. 이들이 주로 골랐던 대상은 가난한 시골 출신 청년들, 관청에 찾아가 항의할 배경이 없는 집안의 자제였습니다. 90% 이상이 휴가도, 외박도, 면회도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입대했다고 당시 물색관 출신 인물이 직접 증언했습니다. 당시 생존자들과 물색관의 증언에 따르면 충분한 설명 없이 모집이 이루어졌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탈영을 시도하다 잡혀온 동기를 집단 처형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배신자의 말로를 보여주라"는 지시 아래 동기생들이 직접 손을 써야 했습니다. 그 기억을 가진 생존자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살인자 아닙니까"라고 말합니다. 국가가 만든 가해자들입니다.

사회복귀: 1초 만에 민간인이 된 사람들

전역 직전까지 북파공작원이었다가 1초 뒤에는 민간인이 됩니다. 이 말이 가장 정확하게 이들의 현실을 설명합니다. 수년간 외부와 차단된 채 지내다 보면, 버스 노선도 모르고, 담뱃값도 모르고, 심지어 집에 가는 길을 찾는 방법도 낯설어집니다. 삼촌도 제대하고 나서 오랫동안 낯선 사람과 대화 자체를 힘들어했습니다. 그게 성격이 이상한 게 아니라, 수년간 다른 세계에서 살았기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란 극심한 공포나 폭력 경험 이후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심리적 후유증입니다. 악몽, 과도한 경계심, 감정 조절 실패 등이 대표 증상입니다. 북파공작원들 사이에서 이 증상은 거의 보편적이었습니다. 89년 입대했던 한 대원은 전역 10년이 지나도록 훈련받던 동작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10세 수준의 정신 연령으로 퇴화해 혼자선 단순 노동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형이 항상 곁을 지켜야 했습니다.

사회 부적응의 문제는 단순히 심리 문제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비군 훈련 면제를 약속받고 불참했다가 모르는 새에 전과자가 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전과 기록은 취업 문을 닫았고, 해외 취업이나 원양어선 승선도 막혔습니다. 같은 시기 중동에 나간 사람들이 돈을 벌어 안정적인 생활을 꾸린 것과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포장마차를 하며 겨우 생계를 잇는 분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이들이 겪은 사회 부적응 문제를 유형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PTSD 및 정신과적 후유증: 전역 후 수년~수십 년 이상 지속되는 심리적 충격, 무의식적 훈련 동작 반복, 감정 폭발
  2. 신체 장애: 척추 손상, 마비, 뼈 골절 후유증 등 치료받지 못한 상처가 만성 질환으로 이어짐
  3. 사회적 고립: 주변의 냉대, 가족조차 꺼리는 시선,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낙인
  4. 경제적 빈곤: 전과 기록으로 인한 취업 차단, 해외 취업·원양어선 승선 불가
  5. 법적 불이익: 예비군 면제 약속 불이행, 군무이탈 전과 기록 등 국가의 약속 파기

특히 배우자들의 희생이 컸습니다. 남편이 북파되고 실종 1년 만에 유해로 돌아온 경우, 남편 없이 막노동으로 자식을 키운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제가 이 증언들을 보면서 가장 먹먹했던 부분은, 어머니가 아들이 온다는 소식에 뛰쳐나오다 쓰러져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는 대목이었습니다. 30개월을 한 번도 못 본 아들이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는 이웃 말에 뛰어나오시다가. 그 어머니가 얼마나 기다렸을지, 그 아들이 평생 얼마나 그 순간을 되새겼을지.

국가책임: 버린 뒤에도 이용한 나라

북파공작원들이 처음 국가에 속아 입대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분노할 일인데, 나라는 전역 이후에도 이들을 또 써먹었습니다. 야당 총재 자택에 침투해 서류를 빼오거나, 현직 기자를 테러하거나, 대선 기간 중 흑색선전 삐라를 서울 전역에 뿌리는 데 이용했습니다. 약속한 대가는 없었습니다. 연락처를 바꾸고 사라졌습니다. "또 속았죠"라는 말 한마디가 그 관계의 본질을 요약합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출처: 국가보훈부) 특수임무유공자법이 2004년 제정되어 북파공작원들에 대한 법적 보상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특수임무유공자(特殊任務有功者)란 냉전 시기 북파 등 특수 임무를 수행한 인원 및 그 유족으로, 일정한 심사를 거쳐 국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법적 지위입니다. 그러나 법 제정 이후에도 자신의 활동을 증명할 기록이 없어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가 철저히 비밀로 유지했던 조직이었기 때문입니다.

공소시효(公訴時效)란 범죄가 발생한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형사 처벌을 할 수 없게 되는 법적 제도입니다. 구타 사망 사건들의 경우 이 시효가 이미 지나버렸습니다. 법조계 전문가들은 당시 상황을 상해치사나 폭행치사가 아니라 살인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책임자들은 취재진의 연락에 "그 부대에 근무한 경력이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가해자들은 자유롭고, 피해자들은 포장마차에서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실종자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20년간 실종된 북파공작원은 5천 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유가족들은 북한에 130명가량이 생존해 있다는 정보를 붙잡고 제사도 지내지 못한 채 수십 년을 보냈습니다. 정부는 "없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진정서를 내도, 탄원서를 써도 "잡아넣겠다"는 협박만 돌아왔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이분들의 희생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관련 현황은 국가법령정보센터 특수임무유공자 지원에 관한 법률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보면서 극우든 극좌든 독재적 통치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댓글 하나, 기사 한 줄을 검열하고, 고문을 국가 도구로 사용하고, 자국민을 소모품 취급하는 체제. 그 시절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지금도 나오는 게 솔직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나라 중에 그런 방식으로 운영되는 곳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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