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밀밀 영화(시대적 배경,엇갈린 사랑,홍콩영화)
오랜만에 다시 꺼내 본 영화가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을 줄은 몰랐습니다. 1996년작 첨밀밀, 처음 봤을 땐 "그저 그런 멜로구나" 싶었는데 나이가 들고 세상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고 나서 다시 보니 전혀 다른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헤어짐도 사랑이었고, 엇갈림조차 운명이었다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 영화입니다.
혼란과 기회가 공존했던 1986년 홍콩의 시대적 배경
이 영화를 제대로 느끼려면 먼저 한 가지를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1980년대 홍콩이 어떤 곳이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저는 홍콩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이미 그 시절의 흔적은 거의 사라진 뒤였습니다. 지금은 더더욱 그 홍콩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볼 때마다 괜히 아쉬운 마음이 밀려옵니다.
1986년은 영국령 홍콩(British Hong Kong)이 중국 반환을 앞두고 극도의 혼란과 기회가 공존하던 시기였습니다. 영국령 홍콩이란 1841년부터 1997년까지 영국이 통치한 식민지 체제를 뜻하며, 이 과도기적 상황은 수많은 중국 본토인들이 더 나은 삶을 찾아 홍콩으로 몰려드는 배경이 됩니다. 영화 속 주인공 소군과 이교 역시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소군은 고향의 약혼녀 소정을 두고 혼자 먼저 자리를 잡으러 온 청년이고, 이교는 출신을 숨기고 홍콩 사람인 척 위장하며 살아가는 여성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회적 맥락이 있습니다. 당시 홍콩에서 등려군(鄧麗君)의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곧 자신이 중국 본토 출신임을 드러내는 신호였습니다. 본토인들 상당수가 자신의 출신을 숨기려 했던 시대였으니, 이교가 카세트 장사에 실패한 것도 단순한 사업 실패가 아니라 그 시대의 정체성 갈등을 상징하는 장면이라고 봐야 합니다.
저는 이 시대를 직접 살지 않은 80년대 이후 세대지만, 그 시절 홍콩영화 르네상스(Hong Kong New Wave)를 경험한 분들이 솔직히 부럽습니다. 홍콩영화 르네상스란 19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홍콩 영화 산업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를 가리킵니다. 웅본색을 비롯해 주옥같은 작품들이 쏟아지던 그 시절, 세기말의 암울함과 희망이 뒤섞인 그 감성은 지금 다시 봐도 지워지질 않습니다.
열 번 엇갈린 사랑, 먹먹함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두 가지를 꼽겠습니다. 맨 마지막 등려군 뉴스 앞에서 다시 만나는 장면, 그리고 알고 보니 처음부터 같은 열차를 탔던 첫 만남 장면. 영화 내용의 상당 부분은 기억이 흐릿한데 이 두 장면만큼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장면 하나쯤 있지 않으신가요?
첨밀밀의 서사 구조는 엇갈림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란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과 사건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뜻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소군과 이교의 엇갈림이 단순한 불운이 아니라 각자의 선택과 외부 환경이 맞물려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소군은 1986년부터 1995년까지 거의 10년 동안 이교를 중심으로 움직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행동하지 못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캐릭터가 좀 꼴뵈기 싫었습니다. 약혼녀가 있으면서 이교와 관계를 이어가고, 소정에게 선물할 팔찌를 고르러 이교를 보석상에 데려가고, 어느 한쪽도 놓지 못하는 그 모습은 낭만이 아니라 그냥 무책임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순수한 사랑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이교의 입장에서 보면 한 여자의 몇 년을 아무렇지 않게 소비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도 영화가 불편함을 넘어 먹먹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요? 아마도 이교라는 인물 때문일 겁니다. 이교는 가장 힘든 시절을 함께 버틴 표를 배신하지 못하고 소군을 빗속에 혼자 남겨두는 선택을 합니다. 이 장면은 지금 다시 봐도 가슴이 먹먹합니다. 이 영화를 헐리우드 영화 라라랜드와 비교하는 분들이 많은데, 제 생각에도 라라랜드의 서사적 골격은 첨밀밀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블랙 먼데이(Black Monday) 사태는 실제 역사적 사건입니다. 블랙 먼데이란 1987년 10월 19일 전 세계 주식 시장이 하루 만에 대폭락한 사건으로, 홍콩 항셍 지수도 약 45% 폭락하는 사태를 겪었습니다. 이교가 악착같이 모은 돈을 주식으로 날려버리는 장면이 단순한 극적 장치가 아니라 당시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겪은 현실이었다는 점에서, 영화가 그 시대를 얼마나 충실하게 담아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출처: IMF Working Paper)
홍콩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의 의미
혹시 이런 생각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나이가 들어야만 비로소 읽히는 영화가 있다는 것. 저는 첨밀밀이 딱 그런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혈기왕성했던 젊은 시절에 봤을 때는 "그저 그런 멜로영화구나" 했는데, 세상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고 나니 완전히 다른 영화로 보입니다. 영화를 보는 사람의 연륜과 경험이 더해지면 좋은 영화라는 것에 새삼 공감하게 됩니다.
이 영화가 오래 기억되는 데에는 등려군의 음악도 빠질 수 없습니다. 등려군(鄧麗君, Teresa Teng)은 1995년 42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중화권 최고의 팝스타로, 그녀의 사망 소식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실제 역사를 겹쳐 놓습니다. 영화 속 이교가 등려군의 사망 소식에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장면은, 단순히 좋아하는 가수를 잃은 슬픔이 아니라 소군과 함께했던 시간 전체가 끝나는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 장면에서 저도 괜히 울컥했습니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도 크게 화제가 됐던 것은, OST가 국내 여성 듀오에 의해 번안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사실에서도 확인됩니다. 90년대 세기말 감성 속에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던 세대가 지금 중장년층이 되어 다시 이 영화를 찾고 있다는 것은, 첨밀밀이 단순한 시대 영화가 아니라 보편적인 감정을 담은 작품이라는 증거일 겁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첨밀밀을 다시 볼 생각이라면 아래 순서로 감상해보시길 권합니다.
- 1986년 홍콩 반환 과도기와 블랙 먼데이 사태 등 시대적 배경을 먼저 간단히 파악하고 본다.
- 소군과 이교 각각의 시점에서 번갈아가며 장면을 읽어본다. 두 인물 중 누가 더 불쌍한지가 달라진다.
- 마지막 장면 이후에는 반드시 첫 장면(기차 안)을 다시 확인한다. 두 사람의 운명이 처음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
- 등려군의 노래를 따로 찾아 들어보면서 이교가 그 노래에 반응하는 장면들을 다시 떠올린다.
지금 다시 봐도 소군의 행동이 불편한 건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외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불편함 속에서도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쩔 수 없는지를 너무 정직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 호출기 한 줄 메시지로 마음을 전하던 그 감성은 이제 다시는 올 수 없습니다. 그게 아쉽기도 하고, 그래서 더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장만옥, 여명, 등려군. 이 세 이름이 한 화면에 담겼던 시절이 새삼 그립습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bAynwRp3sB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