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목의 기술 (번역, 중의법, 현지화)

 

파묘를 처음 봤을 때 제목부터 뭔가 달랐습니다. 묘를 판다는 뜻인데, 그걸 알기 전에 이미 한자어 특유의 묵직함이 있어서 포스터만 봐도 손이 떨렸습니다. 좋은 영화 제목이 뭔지 설명하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파묘를 경험하고 나서는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보기 전부터 궁금하고, 보고 나서도 딱 맞는다는 느낌. 그게 좋은 제목의 조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제목의 기술


좋은 제목은 영화보다 먼저 일을 한다

영화 제목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유인력(誘引力)입니다. 유인력이란 단어나 문장이 독자 혹은 관객을 끌어당기는 힘을 뜻합니다. 파묘는 그 유인력이 제목 자체에 압축되어 있었습니다. 무덤을 판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낯설고, 예고편에서 관이 나오는 장면을 보고 나니 제목이 더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제목이 먼저 분위기를 설계하고, 예고편이 그걸 확인해주는 구조였습니다.

킬 빌(Kill Bill)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Kill과 Bill이 발음과 철자 면에서 라임(rhyme), 즉 운율을 맞추고 있고, 두 글자 구조가 대칭을 이루면서 강렬하게 귀에 박힙니다. 복수 리스트의 마지막 이름이 빌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면, 제목이 그 자체로 스포일러이자 결말의 암시였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제목이 영화의 구조를 이미 반영하고 있는 셈입니다.

슬픔의 삼각형은 개인적으로 가장 지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은 패션 업계에서 실제로 쓰이는 용어로, 미간 사이 주름이 생기는 부위를 가리킵니다. 모델에게는 이 부위에 주름이 잡히면 치명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계급 구조 자체가 뒤집히면서 피라미드형 위계가 역삼각형으로 바뀝니다. 하나의 단어가 직업적 맥락과 사회 구조를 동시에 가리키는 중의법(重義法), 즉 하나의 표현이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동시에 품는 기법을 제목 단계에서 완성하고 있습니다.

초속 5cm도 그렇습니다. 실제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는 시속 10cm에서 50cm 사이라고 알려져 있어 엄밀히 따지면 사실과 다릅니다. 하지만 초속 5cm라는 숫자가 주는 시각적 감각, 느리게 내리는 꽃잎의 이미지, 그리고 기차 연착 장면에서의 안타까움이 한 숫자 안에 압축됩니다. 사실보다 감각이 앞선 제목이지만, 그게 오히려 영화와 완벽하게 맞습니다.

번역이 제목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해외 영화를 국내로 들여올 때는 음차(音借)와 의역(意譯)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음차란 외국어 발음을 한글로 그대로 옮기는 방식이고, 의역은 뜻을 새로 해석해 한국어 제목을 새로 짓는 방식입니다. 두 방식 모두 장단점이 있는데, 문제는 어느 쪽이든 잘못 선택하면 관객이 영화에 닿기도 전에 흥미를 잃는다는 점입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의역 성공의 대표 사례입니다. 원제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를 그대로 옮겼다면 한국 관객에게 '미티'라는 이름이 낯설어 전달력이 떨어졌을 겁니다. 제목을 새로 지은 덕에 소심하게 상상만 하던 사람이 실제로 뛰쳐나가는 영화의 핵심이 제목 한 줄에 담겼습니다. 같은 분이 지었다고 알려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도 인상적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게 아니라 그 인물의 노화 방향이 반대인 것입니다. 감각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논리적으로는 살짝 빗나간 제목입니다.

겨울왕국은 Frozen이라는 건조한 단어를 풍부하게 바꾼 사례입니다. 동화적인 분위기, 애니메이션적 느낌, 이야기의 배경까지 모두 제목 두 단어 안에 들어옵니다. 중국은 빙설기연, 일본은 안나와 눈의 여왕으로 각자 현지화(localization)했는데, 현지화란 원본 콘텐츠를 특정 국가나 문화권에 맞게 재구성하는 작업을 뜻합니다. 그 중에서도 겨울왕국이 가장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제가 가장 납득하기 어려웠던 현지화는 줄리에타입니다. 원작 주인공 이름이 훌리에타인데 제목은 줄리에타가 됐습니다. 영화 자막에서는 내내 훌리에타라고 표기되는데 제목만 줄리에타인 상황이 됩니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남의 이름을 마음대로 바꾸는 건 좀 이상합니다. 아멜리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이름은 아멜리인데 네 글자 징크스 같은 이유로 에를 붙인 건데, 당사자가 알면 황당할 일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번역 제목 중 하나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입니다. Music and Lyrics를 단순히 음악과 가사로 옮겼다면 영화의 색깔이 전혀 살지 않았을 겁니다. 첫 포스터를 보는 순간 로맨틱 코미디의 결이 바로 느껴졌고, 제목 자체에 이야기의 구도가 담겨 있어 보는 사람 입장에서 기대감이 올라갔습니다. 이건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재창작에 가깝습니다.

업계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현지화 제목을 붙이려면 오리지널 스튜디오와 별도로 협의하고 비용도 지불해야 한다고 합니다. 한국 영화 시장이 축소되는 추세라 그 절차를 생략하고 원제를 그대로 음차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처럼 영어 문장을 통째로 한글로 옮기는 방식은 시장 논리의 산물일 수도 있습니다. 이해는 되지만 아쉬운 건 사실입니다. 확장판 개봉 때 양자경의 모든 날 모든 순간으로 바꿨는데, 상투적인 표현일 수 있어도 저는 그쪽이 더 와닿았습니다.

제목이 영화를 망치는 종류

잘못 지은 제목에는 몇 가지 공통된 패턴이 있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하면서 정리해본 안 좋은 영화 제목의 유형입니다.

  1. 스포일러형: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처럼 결말이나 핵심 반전을 제목이 먼저 드러내는 경우. 원제 Vicky Cristina Barcelona는 두 주인공 이름과 배경만 담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한국 제목은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후반부를 알려주는 셈입니다.
  1. 역방향형: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처럼 영화의 핵심 주제와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경우. 이 영화에서 예감은 판판이 틀리고, 정확히는 기억의 부정확성을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반어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진지한 문장 구조입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도 같은 문제입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과거에 붙잡혀 있고, 그 때문에 비극이 생깁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정반대 말입니다.

  1. 발음 혼동형: 컨택트 대 콘택트처럼 이미 유명한 유사 제목이 있는데 비슷한 발음으로 가져오는 경우. 정작 원제는 Arrival로 완전히 달랐습니다. 도착이라는 단어에는 외계인의 도착뿐 아니라 아이의 탄생이라는 의미까지 겹쳐 있어 훨씬 풍부했는데, 그걸 포기하고 혼동을 자초한 셈입니다.
  1. 한글 표기 오류형: 스워드피시처럼 영어 발음을 잘못 표기하는 경우. SWORD의 W는 묵음에 가까워 스월드에 가깝게 읽히는데, 스워드피시로 표기되면서 발음 혼란을 줍니다. 이너 베러 월드도 표기 방식 자체가 어색해서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처음에 한참 헤맸습니다.

추락의 해부는 이 모든 실수를 피한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인물이 물리적으로 추락하는 사건과, 그 사건을 파헤치며 무너지는 가족 관계가 하나의 단어에 겹쳐집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제목으로 돌아오면 두 의미가 동시에 보입니다. 좋은 제목이란 이렇게 작동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영화 제목 번역의 품질과 시장 반응 사이의 관계는 한국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연구 자료에서도 일부 다루어진 바 있습니다. (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제목이 관객의 첫 접점이라는 점에서, 배급 단계에서의 제목 결정이 단순한 마케팅 문제가 아니라 콘텐츠 해석의 영역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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